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4.19 혁명/진행 (문단 편집) ==== 대학생 ==== 4월 19일 당시 오전부터 고등학생들이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고 거기에 거의 때를 같이하여 [[서울대학교]] 문리과대학 학생들이 종로로 진출했다. 이어 9시경에는 법대와 약대, 수의대, 치의대 등 동숭, 연건 캠퍼스의 거의 모든 단과대학이 합류했고 사범대 및 비교적 멀리 있던 상과대학생들은 9시 30분경에 합류했다.[* 당시 서울대학교는 단과대별로 캠퍼스 소재지가 달랐다. 상과대학의 경우는 현재의 종암동 서울사대부고 위치에, 사범대학은 신설동 건너서, 서울사대부고는 현 청량리 미주아파트 부지에 있었다.] 특히 다소 늦게 합류한 의대생들은 '''흰 [[의사]] [[가운]]을 입고''' 시위에 참여했는데 실로 의대생다운 자기들만의 독특한 구호를 썼다. 예를 들자면 "'''학우들이여, 메스를 들어라! 썩은 정치 수술하자!'''" 같은 구호들. 이들은 경무대 앞에서 총격 사건 발생 후 [[서울대학교병원]]과 연락해 의료장비와 앰뷸런스를 지원받아 환자 치료에 힘쓰기도 하였다. 10시 경에는 전날 시위를 벌였던 [[고려대학교]] 학생들이 다시 시위대에 합류했고 이어 [[건국대학교]], [[동국대학교]], [[성균관대학교]] 학생들이 각각 수천 명 단위로 몰려나왔다. 그리고 정오가 되자 [[연세대학교]]와 [[중앙대학교]] 학생들까지 가세하여 학생시위대는 순식간에 10만 명까지 불어나 서울 도심을 가득 메웠다. 다음은 시위에 참여한 대학들의 이름과 참여 숫자를 시위에 참여한 순서대로 정리한 것이다. 정확한 명수는 회고마다 차이가 있다. * [[서울대]] 3,000여명, [[고려대]] 4,000여명, [[건국대]] 2,000여명, [[동국대]] 2,000여명, [[성균관대]] 3,000여명, [[연세대]] 3,000여명, [[중앙대]] 4,000여명, [[홍익대]], [[경기대]], [[한국외대]], [[단국대]], [[국학대학]][* 해방 후 [[정인보]]가 학장으로 취임한 종합대학이었다. 현저동에 있었다고 하며 60년대 후반 [[우석대학교(서울)|우석대학교]](현 우석대와 무관)에 흡수되었으나 이 우석대마저 통째로 1971년 고려대에 흡수합병됨에 따라 현재는 고려대학교의 전신 중 일부로 인정받고 있다.], [[국민대]], 서라벌예술대[* 현 [[중앙대]] 예술대학.], [[숙명여대]], [[이화여대]] 등. 이 중 시위에 참여한 대표적인 대학과 재학생들의 활동은 아래와 같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